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 내전 (문단 편집) == 제2차 그리스 내전[* 흔히 '그리스 내전'이라고 하면 이 제2차 내전을 말한다.] == > 1945년 2월 바르키자 협정 체결의 영향으로 좌파 세력들에 대한 테러와 박해가 시작되었다. 좌파는 12월 봉기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바르키자 협정 이후 나타난 정부-우파 연합 세력의 백색테러는 틸리가 말한 바와 같이 집권층이 질서의 이름으로 집단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 >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p.183 제1차 내전 후 [[1945년]] [[2월 12일]]에 열린 회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EAM-ELAS를 해산하는 대신 [[그리스 공산당]]이 그리스에서 합법적인 정당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합의를 맺었다. 이것이 바로 '''바르키사 협정'''이었다. 그러나 1차 내전 종결 직후부터 X단을 비롯한 친정부 [[극우]] 테러 단체들이 [[백색테러]]와 [[고문]]을 저질러댄 탓에 우익 정부에 대한 대중적인 불만이 고조되었다. 1945년 연말까지 이들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만 1,200명에 가까웠다. 특히 X단은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온건 공화파를 비롯한 메탁사스 독재정권의 소극적 반대파까지 [[테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치안을 맡아야 할 그리스 정부군은 이를 방관했는데 장교단이 왕당파 아니면 EAM-ELAS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았던 EDES 출신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1945년 12월 백색테러에 무력으로 대응할 필요성에 합의한 그리스 공산당(KKE)은 1946년 2월 1차 내전 패배 직후 북부 산악지대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빼돌려둔 구 EAM-ELAS 병력과 물자를 주축으로 '''그리스 민주군'''(DSE)을 창설했다. 소련이 [[발칸반도]]와 [[흑해]] 연안으로 남하하고 소련과 서방 국가 사이의 관계도 악화되는 징후가 뚜렷해지자 공산 진영의 지원을 얻을 수 있겠다고 판단한 그리스 공산당은 [[1946년]] [[3월 31일]]의 그리스 총선 [[보이콧]]과 무장투쟁으로의 전환을 결정했다. 선거 바로 전날 밤 그리스 민주군의 소규모 분견대가 [[올림포스]] 산 인근의 작은 경찰서를 습격했다. '''제2차 그리스 내전'''의 시작이었다. 마르코스 바피아디스 장군이 지휘하는 그리스 민주군은 1946년 여름 내내 고립된 전진 초소들을 습격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46년 12월에는 북부 그리스 대부분과 그리스의 산지가 20,000명이 넘는 규모로 불어난 공산 [[파르티잔]]의 손에 떨어졌다. 불어난 병력을 먹이고 입히고 재울 보급품은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 인접 공산국가에서 지원하기로 합의되었다. 당시 그리스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의 지속으로 엉망진창었다. 그리스 공산당의 세력 확장에 더없이 호의적인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한편 그리스 정부의 뒷배 역할을 하던 영국은 호전될 기미가 없었던 경제 사정과 [[식민지]]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분쟁들 때문에 그리스를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다.[* [[클레멘트 애틀리]]의 [[영국 노동당]] 정부는 전후 대규모 군축을 실시했다.] 1947년 2월 영국은 더 이상 그리스 원조 프로그램을 감당할 수 없다며 미국에게 통보했고 이전부터 소련의 발칸반도 정책을 의심스럽게 지켜보던 트루먼 행정부는 거리낌 없이 이 문제를 떠맡기로 결정했다. 1947년 3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여 [[튀르키예]]와 그리스에 대한 대규모 원조 프로그램 실시를 본격화했다. 원조 초기 미국은 그리스에 대한 지원을 물적 지원에 한정했다. 경제가 원 궤도로 복귀하고 그리스 정부군에 충분한 장비가 갖춰진다면 공산 게릴라 정도야 자체 역량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육군은 1947년 차관과 공여를 합쳐 1억불이 넘는 물자 지원을 받았음에도 한 해 내내 졸전을 거듭하며 밀리기만 했고 특히 알바니아 국경 지대는 숫제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1947년 5월 24일 그리스에 도착했으며, 단장인 대리 레너 대령의 지휘 아래 그리스 육군과 공군, 헌병대의 장비 필요성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이들은 군인 40명과 민간인 2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1948년부터는 [[제임스 밴 플리트]]가 마셜에 의해 그리스 주재 미국 군사고문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고문단의 숫자는 밴 플리트 도착 7개월 만인 9월 말에 이르러 450명에 이르렀다. 1946년에서 1947년 겨울 군과 헌병을 포함한 정부군은 전체 165,000명인 반면 게릴라 세력은 28,000명으로 추정되었다. 게릴라들의 경우 산간지대에 의존했는데 지형이 험준해 정부군의 접근이 어려웠다. 산간마을들은 주민수가 50~2,000명으로 규모가 작았고 수풀이 무성한 계곡에 위치해 외부인들이 쉽게 근접할 수 없어 게릴라들의 근거지로 자주 활용되었다. 트루먼 독트린 발표 이후 그리스 정부군은 영국과 미국 군사 전문가들의 조언 속에 그리스 민주군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한 공격계획을 작성했으며 이들은 북부 테살리의 민주군을 소탕하고, 이어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국경선을 따라 산간 요새를 섬멸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정부군은 민주군 동조자로 의심되는 수천여 명의 민간인들을 무차별 체포하는 한편 산간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소개시켰다.[* 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선인, 2014, p.243] [[1947년]] 말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 북쪽 산악지대에 임시정부를 세웠고 아테네의 그리스 정부는 이를 막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아직 서구권과의 관계를 끝장내고 싶지는 않아 '''[[얄타 회담]]'''에서 그리스를 서구의 영향권에 두기로 한 것을 인정하고 [[코민테른]]이 그리스 공산당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다.[* 물론 소련이 그리스 공산당을 아예 지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KKE와 DSE에게 10만 달러와 60개의 대포를 지원했다. [[http://www.idcommunism.com/2022/02/the-kke-ussr-and-sergey-radchenkos-anti-communism.html?m=1|관련 문서]]] 여기에 스탈린의 지령에 사사건건 반발하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의 갈등이 터지자 스탈린은 [[티토-스탈린 결별|유고슬라비아를 코민테른에서 제명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 상황에서 그리스 공산당(KKE)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대부분의 지원을 담당하던 유고슬라비아 중 누구의 손을 잡을지 선택해야 했는데 결국 KKE는 소련의 손을 잡아 내부의 "티토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KKE는 바피아디스 같은 게릴라전 전문가들이 "티토주의자"라는 이유로 출당당하는 등[* 바피아디스 등 "티토주의자"라는 이유로 숙청당한 이들은 정규전으로는 당연히 정부군에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게릴라전으로 노선을 정하여 성과를 내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소련에서 꿀이나 빤 덕분에 현실 파악도 못 하고 정규전을 요구하던 KKE 지도부와 갈등이 심했다.][* 여담으로 바피아디스는 출당 후 다시 복귀했으나 1964년에 2번째로 출당당했고 결국 공산주의를 버린 후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의 지지자가 되었다.] 전력을 스스로 깎아먹으며 내부 분열에 빠졌고 분노한 티토에 의해 지원도 끊기면서 물자 부족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1948년부터는 미국이 단순 물자 지원을 넘어 그리스군의 작전 및 교육 훈련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고 나섰다. 이 과정에서 250명으로 구성된 [[제임스 밴 플리트]] 휘하의 소수 고문단이 그리스 정부군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장교단의 질적 문제와 쿠데타 우려로 인한 제약으로 적극성이 결여된 오합지졸이던 그리스군은 이제는 일선 소부대까지 '조언'하기 위해 내려오는 미군 고문관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특히 새로 부임한 군사고문단의 단장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그리스 육군의 영관급 이상 장교들에게 공격성이 결여돼 있다고 질타하면서 대담한 공격과 적극적인 추격을 주문했다. 1948년 겨울 양측의 교전이 중단되는 동계 기간 동안 그리스군에게 빡센 교육 훈련 커리큘럼을 소화하라는 지시도 하달했다. 여기에 그리스군의 대규모 확충 역시 이루어졌다. 그리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장군의 지원 사격도 가세했다. 독일군의 침공 이전까지 이탈리아군을 잘 막아내 명성이 높았던 파파고스 장군의 밴 플리트 지지는 미군의 작전 간섭에 반감을 품은 그리스 장교단 내에서도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졌다. 《세계 게릴라전사》의 저자인 로버트 에스프레이에 따르면 미국이 지원한 그리스 정규군은 23,000명 규모의 ELAS쪽 게릴라를 쉽게 이겼어야만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비록 각 지방 수비대의 방어태세가 개선되어 게릴라측에 막대한 피해를 주기는 했지만, 정부군의 대규모 수색 및 소탕 작전은 제한된 성과 밖에 거두지 못했다. 1948년 6월의 정부군 40,000명이 그라모스 산맥에 있는 8,000여 명의 게릴라를 공격했다. 2개월 간의 전투에서 정부 측은 800명의 전사자와 부상자 5,000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 반면 게릴라측은 3,000명이 전사하고 6,000명이 부상당했으며 589명이 포로로 붙잡혔다고 주장했으나, 마르코스 바피아디스가 이끄는 13,000명의 게릴라 병력은 50,000명의 그리스 정부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상당한 희생을 치른 끝에 정부군을 물리쳤다.[*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 게릴라전사》 3, 일월서각, 1989, p.100~101] 그와 동시에 1947년 가을부터 그리스 정부는 좌파에 대한 색출 공작을 감행했는데 이에 대해 아래의 내용을 보자. > 1947년 가을에 그리스 정부는 미국 측의 강력한 재촉에 의해 공산분자의 검거를 재개했다. 정부의 조치에는 '전면적' 징집과 좌익 및 공산분자의 영구적 구금 등이 포함되었다. 경찰은 공산계 신문사들을 폐쇄하고, 공산주의 혐의자들을 공직에서 숙청하는 한편 근로자의 파업권을 폐지했다. 이러한 억압 정책은 그해 겨울 동안 계속되었다. 2월에는 공산주의자 65명을 공개 처형했다. 5월에 들어 공산 테러 분자들이 아테네에서 법무상을 살해하자 정부측은 피비린내나는 보복을 가했다. 이 보복은 너무나도 가혹하여 영국과 미국조차도 항의했을 정도였다. >---- >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 게릴라전사》 3, 일월서각, 1989, p.101 그리스 정부는 민간 부문에서도 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복 활동 혐의자 체포를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을 기소하거나 처형했는데 1948년 2월 7일에는 29명이 총살되었고, 2월 22일에는 19명이 총살되었다. 3월 1일에는 그리스 해군 60명이 전복 음모로 체포되었으며, 3월 13일에는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2명과 《리조스파티스》 편집장을 포함한 공산주의자 14명이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우익 경찰도 아테네, 피래우스, 테살로니키의 공산주의 세포들을 와해시키고, 2월에는 남부 지방의 지하에서 활동 중이던 세포 200여 명을 체포했다.[* 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선인, 2014, p.243] UP통신은 그리스 정부가 5월 5일 그리스 전역에서 '데켐브리아나'와 관련된 살인 혐의자 152명을 처형했다고 보도했는데 아테네에서 24명, 에기나 섬에서 37명, 라미아에서 12명, 테살로니키에서 23명을 처형했고, 나머지는 칼키스, 트리폴리스, [[스파르타]], [[칼라마타]]에서 처형했다고 밝혔다.[* 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선인, 2014, p.244] 미군이 지원한 네이팜탄도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를 냈다. > 밴 플리트는 5월 초부터 민주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그리스군 일반 참모부 및 합동군사고문단 참모진과 함께 민주군의 근거지인 북부 지방의 그람모스에 대한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크라운 작전'''(Operation Crown)으로 명명된 이 계획은 그람모스 북•동•서쪽의 세 방향에서 공격하는 것으로 그리스 정부군이 시도한 최대 규모의 공세작전이었다. 그람모스는 현지 주민들도 꺼리는 험준한 산악지역이었다. 알바니아와 인접한 그람모스 지역은 해발 1,300~2,000m 높이의 고봉으로 이뤄졌으며, 암석과 산림이 무성한 급경사 지형이었다. 민주군은 이곳을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렀다. 그리스 정부군은 6월 초 민주군의 후방을 분쇄하기 위해 그람모스 산악지대에 대한 대규모 작전을 전개했다. 그리스 공군은 6월 20일 그람모스 산악지대의 민주군 집결지에 처음으로 미국의 네이팜탄을 사용했는데, 내전 지역에서 네이팜탄의 사용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미국 사절단은 심지어 네이팜탄 사용으로 인해 민주군과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의 이런 선전활동에 흔들리면 치명적이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실제로 네이팜탄의 희생자들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대부분이었다. >---- > 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선인, 2014, p.247 1948년 봄이 되자 그리스 정부군은 132,000명의 병력과 각종 포 및 장갑차, 2개 비행편대 등을 소유하게 되었고 국가경비대도 50,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5월에 이르러 그리스 정부군은 공군이 6,500명에서 7,200명으로, 해군은 13,000명에서 14,300명으로, 나머지 15,000명은 육군에서의 증강이 허용되어 전체 병력이 168,000명으로 늘어났다. 아무튼 트루먼 행정부가 보낸 제임스 밴 플리트의 진두지휘 아래 그리스군의 전력 확충과 엄격한 교육훈련, 장교단의 질적 향상이 본궤도에 오르자 드디어 일선에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9년 초 겨울에서 봄부터 그리스군은 연이은 산악지대 포위 및 소탕 작전을 펼치면서 매번 수천 명 단위의 사살 및 포로 획득 전과를 올렸고 내부에서 분열한 데다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로부터의 지원도 끊긴 그리스 민주군은 정부군의 공세로 인한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 해가 가기 전에 붕괴되었다. 그리스 정부군은 1949년 1월 19일 공식적으로 시작될 예정이었던 펠로폰네소스 수색작전의 기초가 될 '''비둘기 작전'''(Operation Pigeon)을 앞두고 게릴라들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밴 플리트는 >'''게릴라전에서 정부는 적 동조세력으로 의심받고 있는 사람에 관한 한 군인 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람의 권리를 보호할 의무가 없다.''' 고 주장했다. 아무튼 그리스 정부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게릴라 부대와 싸우는 동안 일부 군 지휘관들은 미군의 장비를 그리스 공산당에 넘겼고 그들에게 누가 공산주의자인지를 결정할 심판권과 처리권을 주었다. 1949년 2월 11일 3,000명 이상의 게릴라들이 플로니라를 기습해 북쪽 고지를 점령했지만 정부군은 공군의 지원과 함께 인근 지역의 탱크 및 장갑차 등을 동원해 반격했다. 이 전투에서 최소 500명 이상의 게릴라가 전사하고, 35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결과적으로 민주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상실한 뒤 비치 지역으로 퇴각했다.[*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 p.258] 1949년 9월 정부군은 공산당 임시정부의 소재지였던 그라모스산을 함락시켰고 그해 [[10월 16일]] 그리스 공산당 방송국은 >"그리스의 완전한 파탄을 막기 위한 일시적인 휴전" 이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패전 선언을 하면서 제2차 내전은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1949년 10월부터 1950년 사이 게릴라들의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밴 플리트는 1950년 5월 2일 워싱턴에 >'게릴라의 총인원은 500여 명 이하의 소규모 집단이며, 생존이 유일한 목적일 정도로 그들의 환경은 열악하다.' 고 보고했다. 패전 이후 많은 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이웃나라인 [[알바니아 인민 사회주의 공화국|알바니아 인민공화국]]으로 도망쳤다. 또 내전이 공식적으로 끝난 뒤 소련 선박들이 알바니아 항구로 들어왔고 민주군의 잔여 병력을 태웠으며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소련의 오지에서 여생을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